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2012년 1월 14일 이근안 목사에 대해 목사직 박탈을 결정했습니다.
이근안은 향후 복직도 불가능합니다.
목사직 박탈 이유
“이근안 목사는 과거에 고문 기술자로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목사로서 신중한 삶을 살아야 했으나, 직분을 망각하고 반공강연에 나서 `고문은 예술`, `나는 애국자`라는 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미화했다. 이로 인해 이근안 목사가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교단의 명예를 손상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덧붙여 “이근안 목사가 언론에 한 발언이 문제가 되자 총회장이 이근안 목사를 불러 주의를 주기도 했다. 이근안 목사가 김근태 씨의 유가족을 찾아가 진심으로 사죄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교단은 이근안 씨가 통신신학 과정으로 목사 안수 자격을 획득한 것이 문제가 되자, 통신신학 과정도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또 “이근안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목사 안수를 줘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습니다.
앞서 이날 오전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와 한국교회 정화운동협의회는 총회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근안 씨의 목사 안수 철회를 요구하고, 5,000명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를 교단 쪽에 전달했습니다.
이근안은 누구입니까?
이근안의 과거 직업은 군인, 경찰관이었다. 목사 면직되기 전 최근까지는 개신교 목사였다.
이근안 가명은 김철수이다. 그 외 이근안은 고문 기술자, 박 중령, 불곰, 반달곰 등으로도 통하는 별칭도 있다.
1970년대 후반~1988년까지 대공, 방첩, 공안 분야 수사 담당관으로 활동했던 이근안은 1970년 경찰 계에 입문, 1980년대에 경기도지방경찰청 등에서 대공, 방첩 전문 수사관을 맡았다.
수많은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이근안은 고문 기술자라고 불렸다. 1979년 남민전 사건과 1981년 전노련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불법 체포를 하기도 했다. 1988년 군사정권이 붕괴한 이후 이근안은 불법 체포 및 고문을 시도한 혐의로 수배되어 2000년에 체포되었고 재판 결과 징역 7년과 자격 정지 7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2006년 11월에 출소했다. 출소 후 2008년, 이근안은 목사 안수를 받고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군대 시절
이근안은 공군에 입대하여 헌병에서 복무하다 전역했다. 1970년 경찰 공무원에 채용, 순경으로 임용되었다. 군인 출신 이근안은 경찰 재직 중 박 중령, 불곰, 반달곰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사기꾼, 도박사범, 마약사범 등을 여러 명 검거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경찰관 시절
1970년대 경찰청 대공분실 형사로 전보되었고 1970년대 후반 이근안은 대공분실장으로 승진했다. 이근안은 대공분실장 재직 중 재야인사 및 학생운동권 고문 등의 악행을 일삼았고, 1979년 간첩 용의자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자, 현대중공업에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위장 취업하기도 했다.
이후 신분을 숨기고 7개월간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용의자의 동태를 파악하여 검거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을 수사했고 그 관련자들을 검거했다. 이근안은 간첩 용의자와 야당 인사, 민주화 운동가들을 감시, 불법 체포하기 위해 엿장수, 월부책 장사, 강냉이 장수 등으로 변장하여 활동했다. 1979년 이른바 성실 근무로 청룡봉사상과 근정훈장 등을 수상받았다. 그 후 경기경찰청 공안분실 실장으로 부임한 이근안은 김근태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수배 후 불법 체포했다.
이근안의 고문 방법
범인 조사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김근태 전기고문, 유숙열 여기자 물고문, 관절 빼기, 볼펜 심 꼽기 등의 고문 기술로 사람들을 고문하여 이근안은 고문 기술자로 불렸다.
1981년 전노련 사건을 수사하여 그 관련자들을 전원 불법 체포하기도 했다. 특히, 1985년에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고문했던 혐의(이근안 김근태 고문 사건)는 1999년 검찰 조사에서 자수 이후 일부 인정했다.
구속
1987년 2월 제5공화국이 붕괴하고, 갇힌 일부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이 석방되면서 이근안의 고문 행위를 주장했다. 이후 이근안에게 고문당했다는 인사들의 증언과 목격담이 사회적으로 드러나면서 비판을 받았다. 1988년 이근안은 스스로 경찰 관직을 사퇴했다. 1988년 12월 퇴직 이후, 여러 차례 공소가 제기되어 경찰은 이근안을 공개 수배했다. 그러나 10년 10개월 동안 집 근처 창고 뒤에 은신하고 있다가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했고, 1999년 11월에 구속기소가 되었다.
2000년 9월, 대법원은 이근안에 대해 징역 7년과 자격 정지 7년을 확정했다. 이에, 이근안은 사과문을 발표했는데 정치인 김근태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여 옥중에 갇힌 이근안을 면회하기도 했다.
그 후 2005년 10월 법무부에서 이근안은 가석방 부적격 결정을 받았다. 수감 생활 중 이근안은 자신이 고문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김근태에게 사과하였으나, 김근태는 “이 전 경감이 제게 ‘눈을 감을 때까지 용서를 빈다’고 했지만, ‘이 양반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이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김근태는 “이제 두려움은 많이 가셨지만 1980년대 중반에 무참하게 짓밟혔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면회가 끝난 후 돌아와서 이근안 전 경감의 용서를 빌고 싶다는 이야기가 진심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조금 괴로웠다”라며 이근안의 사과에 대해 그 진의를 의심했다.
이근안 김근태 어떤 관계입니까?
이근안 김근태 고문 사건, 김근태 별세와 사망 원인 (바로 가기)
김근태 고문 사건, “이근안 사과의 진의가 의심스러웠다.”
여주 교도소에서 복역한 이근안은 2006년 11월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이근안은 출소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라고 출소의 변을 대신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어떻게 목사가 되었나?
이근안은 옥중에서 통신 과정으로 신학교에 입학, 한때 모범수로 지목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한국교정선교회를 통해 개신교를 접한 이근안은 출소한 다음 총회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전도사 시절에는 신앙 간증 집회에 참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10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산하 한 분파의 목사 임직 식에서 이근안은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다.
이근안은 목사 활동 중 자신의 고문 활동이 애국이라고 주장하는 등 논란을 빚었다. 이근안이 소속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결국 2012년 1월 14일 이근안을 목사직에서 면직하는 결정을 내렸다.
최초 입력 2012.01.20 ⓒ 리뷰 걸이 말한다, 무단 복사, 전재 및 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