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자른 로커, 쏘울과 발라드 가수로 강요당하다
로커, 머리를 자르다
록의 전성기는 피다 진 꽃처럼 짧게 끝나고 말았다.
록 음악으로 성공을 하면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친구들은
보컬리스트란 말이에요. 이승철 같은.
가만 안 놔두죠. 기획사에서 데려다가 솔로 가수로 데뷔시키고
본인들도 더 좋은 대우를 받고 하니까
-강정식, 전 월간 팝송 기자
1989년의 이승철
솔로로 이름을 알린 이승철은 부활의 회상 3을 리메이크한
마지막 콘서트를 불렀고 그것은 그에게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조용필은 자신의 뒤를 잇는 보컬리스트로 이승철을 손꼽았다.
밴드를 하던 시절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영광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작사/작곡: 박광현


가혹한 변신, 유현상 여자야
백두산을 떠난 유현상은 트로트를 선택했다.
그것은 세상을 놀라게 한 깜짝 결혼 때문이었다.
이미 30대였던 그는 현실적으로 더 록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여자야라는 트로트를 불렀을 때 모든 사람이 놀랐던 게
그렇게 시끄럽게 메탈 했던 사람이 야들야들한 트로트 여자야를 부르니까
그 간극이란 것은 우리 역사상 아마 가장 가혹한 변신이었을걸요
-임진모, 음악 평론가

여자야
작사/작곡: 유현상

가정을 이루면서 이제…
아마도 부양도 못 했을 거예요. 록을 했으면
-유현상
아시안게임 수영 금메달리스트였던 최윤희는
당시 김연아에 비견될 만한 국민적 스타였다.
그는 달라져야 했다.
김종서 머리 자른 사진

대답없는 너
작사: 채정은/작곡: 김종서
김종서도 머리를 자르고 TV로 향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노래 보컬 실력도, 록은 립싱크 안 하거든요 댄스는 립싱크해도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는 가수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고요
-김형석, 작곡가
TV에서의 성공은 곧바로 인기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만이 출연했다는 몰래카메라
김종서는 데뷔 첫 회에 그 주인공이 됐다.
보컬 잃은 기타리스트의 비애
당시 음반 업계에서는 로커의 머리를 자르고 솔로로 데뷔시키면
대박 난다는 말이 정설처럼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다 노래를 부르는 보컬들의 얘기였다.
라이브 무대가 많지 않은 방송의 특성상 밴드는 오히려 불필요한 존재였다.
보컬을 잃어버린 기타리스트에게는 좀처럼 무대에 설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기타 실력 하나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신대철이
녹음 반주를 한다고 하자 일이 몰렸다.
힙합, 댄스, 발라드를 가리지 않고 원하면 기타 반주를 했다.
“이것저것 세션(반주) 많이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내가 연주해놓고 내가 (연주했는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게
아, 이것은 나의 길이 아닌가 보다 그 순간에 딱 그냥 그날부터 안 했어요”
무대가 없으니 남는 건 시간뿐이었다. 기타를 놓을 수 없어서 매일 열심히 튕겼지만 그럴수록 더 괴로웠다. 그 음악을 세상에 들려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김태원은 몇 번이고 새 보컬을 영입해 앨범을 냈다. 하지만 3집 이후 10년 동안 부활의 음반은 예전 같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멤버들은 밴드를 떠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돈이 없어서 배가 고프고 뭐 이런 차원이 아니고 음악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관심을, 음악으로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죽을 수도 있다’라는 상황까지 저는 들어갔습니다”
“기타 하드케이스를 들고. 그 손이 시린데 들고 정처 없이 걷던 시대죠.
그만큼 고독했습니다. 차비도 없었을 거예요. 아마 차비도 없었을 거고”
“제가 어렵다는 걸 말을 못 해요
어려운데, 돈이 없는데 어디 가서 말을 못 하는 거예요. 누구한테도
아니 넌 유명한 사람이 왜 돈이 없어, (사람들이) 그러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면 또 가슴이 아프죠 그런 얘기는…
그렇기 때문에 그 얘기는 또 차마 못 하겠네요”
김도균 임재범 영국 진출 사진
록이 침체기를 맞던 80년대 말 그는 친구와 영국으로 갔다.
록의 본고장에서 승부수를 띄워보자는 포부였다.
그들은 작은 아파트에서 함께 지냈다.

임재범 리즈 시절 모습 독특한 헤어스타일 장발 머리가 눈길을 끈다.


The same old story
작사/작곡: 김도균, 임재범
이들은 영국인 2명과 밴드도 결성했는데 그 이름은 ‘SARANG’
‘사랑’은 클럽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지역 BBC 라디오에도 출연했다.
특히 임재범의 노래는 가는 곳마다 인기가 좋았다.
임재범은 ‘톰 존스의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불렀고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영국인들이 기립손뼉을 쳤다.
그는 그 자리에서 3번의 앙코르를 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두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와 밴드 아시아나를 결성했다.
둘이 함께 곡을 쓰고 음반 작업을 했다.
일본 록밴드 라우드니스가 내한했을 때는 오프닝 밴드로 무대에 섰다.
길이 보이는 듯도 했다.
아시아나는 수퍼 그룹리라고 할 수 있어요. 드디어
해외를 노리고 활동하는 밴드가 나왔다고 생각해서 주목했죠
능력이라든지 체구라는 면에서 완전히 임재범 씨 김도균 씨가 압도 하면서
인터넷 용어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는
라우드니스의 그 벽을 충분히 우리도 이제 경쟁할 만하다
-성우진, 음악평론가
-마사이토, 음악 평론가
아시아나의 음악은 일본의 록큰롤계에서도 화제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댄스 음악이 대세였던 음반 시장은 그들이 결성했던
아시아나를 차갑게 외면했다.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가난한 로커의 생활만이 남았다.
반지하 전세 뭐 그런…
(부모님께) 손 벌리고 그렇게 하기도 했었죠
-김도균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1991년

솔로 1집은 무려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대성공 그러나 록을 하던 동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 당시에도 가끔 포장마차나 이런 데서 막걸리 한잔할 기회가 있으면
전 대철이한테 무조건 사과부터 했어요. 미안하다”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니예요. 라고 집어 던지고 오대산으로 가서 1년 동안 혼자 있었거든요.
그는 이제 로커 대신 한국의 마이클볼튼으로 불렸다.
TV는 그를 쏘울과 발라드 가수로 서라고 강요했다.
같이 보기

스키니진 가죽 재킷 패션이 시선을 끈다.
장식 화려한 김도균의 장화가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이다.
최초 입력 2011. 7. 9. 08:03 방송 리뷰 ⓒ 리뷰 걸이 말한다, 무단 복사, 전재 및 배포 금지